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의 옥 (문단 편집) == 결과 == 강희제, 옹정제 시기의 대규모 탄압으로 화남 지방에 기반한 반청복명세력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뿌리째 뽑혔다. 그리고 뒤이은 건륭제의 탄압으로 얼마 안 남은 복명사상가들과 수많은 저작저술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문자의 옥은 한족과 만주족을 안 가렸기에[* 위에 언급한 호중조 사건을 예로 들면, 호중조와 교류하던 사람 중에 [[옹정제]]의 총신이자 태묘 배향공신이었던 시린기오로 오르타이의 조카가 있었는데, 호중조가 지은 문집을 선물받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조카는 자살을 명받았고 같은 가문 출신이었던 건륭제의 후궁은 상재였던 낮은 품계가 건륭제가 퇴위하기 전까지 40년 가까이 동결되고 태묘에 배향된 오르타이의 위패도 쫓겨나는등 가문이 박살나버렸다.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연루되어 박살나버린 만주 명문가가 여럿 있었다. 문자의 옥으로 멸만흥한을 도모하던 한족만이 아닌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자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큰 원동력인 만주족까지 서로 거래하거나 선물을 주고 받거나 구면이었다는 등의 시덥잖은 이유로 가차없이 숙청당했다는 점에서, 문자의 옥은 그저 청나라의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했다.] 서로 황제나 반대파에게 무슨 트집을 잡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 보니 무조건 몸을 숙이고 조심하면서 황제의 독재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제 아무리 많은 사상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마음 속으로 멸만흥한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겉으로만 청조에 충성했다.[* 이 시기 청나라에 사신으로 온 조선인들의 복색을 본 한족 지식인들이 '이것이 선왕의 유풍'이라며 탄식했다는 얘기는 나름 유명하다. 물론 조선 복장과 명나라 시절 한족 복장이 똑같은건 아니다만 그렇게라도 옛 조상들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한 것.] 이는 건륭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태평천국 운동]],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청이 멸망하면서 당연히 상당수의 만주족이 보복으로 갈려나갔다. 한편, 문자의 옥은 명대 중기 이후 나타난 자유로운 학문 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당연하겠지만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꼬투리 잡아 죽일텐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그 결과, 청대의 지식인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이 대상인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나라 학문의 막장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흔히 [[사문난적]]이나 [[성리학]]의 교조화를 운운하지만, 조선의 학문적 분위기[*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은 국왕의 면전에서 효종은 적통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익(실학자)|이익]]은 대놓고 우왕신씨설을 디스했다. 소위 사문난적 드립 역시 이것으로 제도권의 제재가 가해진 일은 없다.]는 최소한 청나라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심지어 숙종-영조 시절의 당파적 갈등이 극심했던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영조]] 시절의 여러 역모 사건과 옥사 사건들을 보면 분명히 당하는 쪽에서도 억울할 것 없는 경우였다. 영조 4년의 무신난은 명백한 반란이며, [[나주 괘서 사건]] 역시 반역 모의를 위한 것이었다. 해석이 억지였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의도가 명백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